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 포트 (문단 편집) === 몰락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repubblica.it/2gra.jpg|width=100%]]}}}|| || {{{#fff '''[[1980년]] 1월 17일, 캄보디아 정글에서 [[ABC(미국)|ABC]] 뉴스 팀과 인터뷰하는 폴 포트'''}}} || 무슨 깡인지 모르겠으나 미군이 버리고 간 물자들을 흡수하고 전투경험도 잔뜩 쌓은 베트남을 선제공격하여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가 되려 역관광 당하여 결국 [[1980년]] 1월 7일에 베트남군은 수도 프놈펜을 함락하면서 [[민주 캄푸치아]] 정권을 붕괴시켰고, 베트남군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반크메르 루주 공산 세력들의 주도로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 세워진다. 이때 정권을 잃고 쫓겨난 폴 포트와 키우 썸펀 등 크메르 루주 세력들은 밀림으로 들어가 캄보디아에 주둔한 베트남군과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정부군에 맞서 저항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한동안 폴 포트의 사망설까지 돌 정도였다. 한편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내고 친베트남 정부를 수립하자 미국과 중국은 베트남의 캄보디아에 대한 영향력 투사를 막기 위해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라며 정권을 잃고 반군 단체로 전락한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 이 때는 소련 견제와 [[헨리 키신저]]를 위시로 한 외교 정책에 의해 중국과 더 가까웠고 따라서 친중적인 캄보디아를 밀어준 것. 미국의 이같은 개입은 지금까지도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이때의 지원으로 인해서인지 크메르 루주 반군병이 [[M16 소총]]이나 [[56식 소총]] 같이 미국제 총기와 중국제 총기를 함께 사용하는 사진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조차 이를 비난할 자격도 없는 게 이들 스스로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베트남의 불법 괴뢰정부라 보며 집권시기 동안 잔혹한 학살과 탄압을 일삼던 [[크메르 루주]]를 캄보디아의 합법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글로 도망친 폴 포트는 공식적으로 크메르 루주 총지도자에서 물러났으나 실세로서 계속 막후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결국 부하들과 충돌했다. 1990년에 베트남군의 철수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자 [[시아누크]]의 민족통일전선(FUNCINPEC), [[손 산]]의 크메르인민민족해방전선(KPNLF)과 함께 새 정부 구성을 논의코자 했다. 그러나 폴 포트는 옛날부터 함께 해 온 동료들보다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따 목]](Ta Mok, 19262006)[* 본명은 칫 초은(Chhit Choeun)으로, 민주 캄푸치아 시절에 캄보디아군의 지도자였으며, 말기에는 공산당 제2부비서 겸 서열 3위였다. 다른 크메르 루주 수뇌부들과는 달리 소작농 가문 출신이었고, 1970년경에 캄보디아 내전 과정에서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총참모장을 의지했고 1990년대에는 따 목이 폴 포트를 대신해서 간부들을 회의에 소집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베트남과 베트남의 지원을 받던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정권이 폴 포트 정권이 자행한 킬링필드의 실상을 전 세계 각국에 홍보하면서 폴 포트와 그 세력에 대한 비난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이들을 지원해준 미국과 중국도 같이 비난을 받으면서 점차 손을 떼기 시작한다. 결국 국제적인 여론과 UN의 개입으로 1993년에 1970년 쿠데타로 축출되었던 시아누크 국왕을 다시 국왕으로 복위시키면서 무너졌던 캄보디아 왕국이 다시 재성립되었고 이에 불복한 폴 포트와 그의 측근들이 복귀한 캄보디아 왕실에 반기를 들며 내전을 벌였기에 폴 포트에 대한 비난은 더 커져 갔다. 심지어 세계 문화유산인 앙코르와트도 이 내전으로 큰 수난을 당했으며 당시 총격전으로 인한 총탄 자국과 총알이 석조 조각에 박혀 있는 모습도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런 장기전 아래 폴 포트파의 내분은 더욱 심해졌고, 1995년 부하들의 배신으로 폴 포트는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한 중국 원조를 착복한 배신자로 규탄 받은 이엥 사리는 1997년 숙청에 겁을 먹어서 병사 4천명을 이끌고 캄보디아 왕국 정부군에게 투항했는데, 폴 포트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여담으로 폴 포트는 권력에서 쫓겨난 후 얼마 안 있어 본인의 집권 무렵부터 [[조현병]]과 [[망상장애]]에 시달려온 전처 키우 폰나리와 이혼하고는[* 키우 폰나리는 1970년대 초부터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폴 포트는 그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다.] 1985년 여름에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며 자기보다 37세나 어린 23세의 탄약 운반자 미어 손( , Mea son, 1962)과 재혼하고 다음해 봄에 미어 싯(Mea Sith, 1986)이라는 이름의 딸을 가졌는데, 폴 포트는 61세라는 비교적 고령에 자신이 처음으로 가진 자녀였던 미어 싯을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정작 폴 포트는 집권 당시 중앙위원회 회합에서 '''어머니와 자식이 너무 긴밀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최악의 망언을 남겼다. 심지어 국민들의 자유 결혼과 가족끼리의 애정 표현을 모조리 금지시키고 자신들의 사상을 더 쉽게 주입하기 위해 캄보디아의 가족들을 연령과 성별로 구분해 강제로 다른 지역으로 흩어놓아 [[이산가족]]을 만들어 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